백과사전/읽어볼만한글

내가 IT 개발자 20년하면서 본 것들...

sheepone 2021. 7. 1. 11:41
반응형

<<<< 과거의 은행 >>>>
 
1997년 IMF가 터지기 전에, 은행의 창구에 가보면, "왕언니"라고 불리는 - 상고 졸업하고 부기와 주산, 암산을 잘하는 - 여직원이 창구 뒷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역할은 주로 창구 여직원들의 업무 지원과 고객 상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고객이 와서 "아가씨, 이번에 내 정기적금이 만기가 되서 보니 이자가 이렇게 나왔어요. 왜 이것 밖에 안나왔지요?"라고 물어보면, 이 왕언니는 본인의 풍부한 업무지식을 가지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면서 새로운 상품 소개까지 했습니다. 고객은 만족하면서 돌아갔겠지요...
 
그러다가 IMF가 터지자 국내 은행의 주인이 된 미국의 자본가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이런 국내 기업의 업무 전산화였습니다. 
 
대형 컴퓨터를 들이고 업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업무의 자동화와 전산화를 하면서 창구에 있던 여직원들의 업무가 단순화되고 신속 정확성을 더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 현재의 은행 >>>>
 
하지만, 이제 고객이 다시 창구를 찾아가서 전과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손님: 아가씨 내 정기적금의 이자가 왜 이렇게 나왔지?
 
아가씨는 바로 전화기를 들고 전산실에 연락합니다. 통화를 시작하면 전산실에서 정기적금을 개발한 프로그래머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래머에게 상황을 얘기합니다. 프로그래머는 자기도 창구 프로그램을 돌려보면서 설명을 해줍니다. 여직원은 들은 그대로 손님에게 설명을 하면 결국 손님은 미심쩍게 발걸음을 돌립니다. 
 
<<<<<과장된 내용이라구요?>>>>>
 
이것이 저는 전산화가 되면서 생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모든 기업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산화가 되면서 업무의 노하우를 실제 영업직원이 아니라 전산실의 프로그래머가 더 많이 갖추게 되었습니다. 
 
컴퓨터는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해주고 일을 쉽게 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만, 이를 오용함으로써,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지식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직원들의 마인드까지 바꿔놓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비전산 부서의 직원들은 컴퓨터에 대한 무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분야의 업무 지식을 몰라도 ... 컴퓨터가 대신 해줄것이다...>>>>
 
<<<< 어려운 업무, 상품 개발, 설계, 업무 분석... 이런 것들은 컴퓨터가 해줄 것이다. >>>>
 
<<<<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컴퓨터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들을 컴퓨터를 담당하는 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
 
<<<< 우리는 기본적인 지시만 하고 구체적인 설계와 분석과 개발은 컴퓨터 담당자들이 하는 것이 맞다 >>>>
 
<<<< 아, 컴퓨터의 혜택이 이런 좋은 점이 있구나! 우리는 이제 일찍 퇴근해도 컴퓨터가 나머지 일들을 해줄 것이다. >>>>
 
IMF 이후부터 지금까지 기업의 사고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제 말이 과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은행에 가시면 더 이상 고등학교를 나온 왕언니들은 없습니다. 수 많은 시간 속에서 컴퓨터가 왕언니 역할을 하는 - 실제로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 -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업부서에서는 전산실의 도움 없이는 제안서를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품개발부서는 전산실에게 상품 설명서 몇 장 던져 주면 상품설계와 개발 프로그램이 나오는 좋은 기업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제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아시겠지만...)
 
전산실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공대 전산과를 나온 공돌이들은 이제 코딩보다도 증권업무, 은행업무, 회계와 세금 업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각 상품별로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설계서가 나오지 않으며 이것이 없으면 코딩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있던 xx은행의 여신 영업부장이 당연한 듯이 이런 말을 제게 하더군요...
 
"너희 전산실 직원들은 왜 업무를 하나도 모르냐?"
 
공교롭게도 수신영업부장, 관리부장, 총무부장, 사후관리팀장이 같은 말들을 번갈아 하더군요. 
 
더욱 놀라운 일을 한 가지만 더 말해 볼까요?
 
어느 날, 높은 분이 회사의 금융 자산가치를 시간별로 정리해서 특장점을 넣은 챠트를 만들어 올리라고 기획실에 지시했습니다. 당연히 기획실 담당자는 전산실에 그대로 지시했구요.. 자료를 만들어 줬더니 그 기획실 담당자가 자료를 읽지 못해서 높은 분한테 보고하러 갈때 전산실 직원이랑 동행하자고 하더군요....
 
오늘 날 전산실의 직원들은 상품설계와 업무 분석과 진행 보고서를 쓰는 업무 부서의 부속집단이 되었습니다.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본연의 업무만 할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합니다. 
 
매일 야근을 해도 생색도 내지 못합니다. 당연히 야근하는 부서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하는 일이므로 야근비를 청구하려면 눈치가 보입니다. 휴일날 근무를 하고 특근을 해도 타 부서 사람들은 관심도 없습니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시스템 작업을 하고 있는데도 왜 제 시간에 오픈을 못했냐고 욕만 안먹으면 다행이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전산실은 더 힘들어 졌습니다. 전보다 더 좋은 기계를 사주었는데 왜 장애는 더 나냐고 묻습니다. 지치고 힘들어 회사를 관두면 신입사원을 뽑아주고 같은 퍼포먼스를 내라고 합니다. 
 
<<<< 그러다가 >>>>
 
증권사의 업무는 상당한 리스크를 내포합니다. 1초라도 잘못된 트랙잭션이 발생했을 때 수 억에서 수 백 억까지 손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증권사에서 이런 기업 환경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답니다. 논의와 연구 끝에 그들이 만든 것이 바로 '업무설계팀'이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하나였습니다. 상품설계를 하되 전산실에서 그것을 보고 코딩이 바로 가능하도록 상품설계서를 만든다. 전산실은 코딩만 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단, 이 조직은 비전산실 출신의 직원들로만 구성한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 끝으로 한 마디 더 >>>>
 
어찌되던 프로그래머들은 전산실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전산실장이 됩니다. 그런데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전산실의 직원들이 아무리 지금 온갖 일들(?)을 하면서 노하우를 쌓아도 회사는 우리를 공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획실장? 영업본부장? 심지어 CEO? 국내에 그런 역사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 카드사의 전산실장직은 빽없는 비전산 임원의 낙하산 자리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결국 전산실장이 되면 나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수 년, 수 십년간 쌓아 두었던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과 지식이라는 노하우는 아무도 평가해 주지 않습니다. 왜냐면 공돌이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단지 신입사원 두 명만 더 뽑아도 되는 자리라고 CEO는 생각합니다. 
 
한국은 이런 마인드라서 기업이 성공하지 못합니다. 
 
한국 기업들에게는 사람을 천시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실력이 좋으면 이것 저것 시키면서 회사가 받은 좋은 영향들을 더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돈은 못 벌어도 자리는 지키고자 하는(?) 얄궂은 마인드가 지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퇴직한 경력자는 어떻게 하든 코딩이라도 해보고 싶어합니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하지만...
 
결단컨대, 다른 나라는 이렇게 심하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프로그래머.... >>>>
 
세월이 흐르면서 프로그래머는 기업의 핵심 업무와 풍부한 노하우를 가진 집단이 되었습니다. 비전산 직원들의 안일한 배임과 전산실을 천시하는 현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현실이 우리에게 악이 될까요? 선이 될까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이 관점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네요...

 

출처 : patronia 내가 IT 개발자 20년하면서 본 것들...(2) 2016-08-19 오후 4:40:46

반응형